해냄성가대/음악강좌

전례의 성사성과 전례 개혁 -- 신 호 철 비오 신부

성가대원들 2013. 5. 20. 16:11

 

전례의_성사성과_전례_개혁-신호철 비오 신부.doc

전례의 성사성과 전례 개혁

 

서언

 

한국천주교회는 로마보다 로마적이다.’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표현은 한국과 로마가 다른데 뭔가 우리의 고유한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고 로마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로마적인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로마의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무엇이며 어떻게 진화해 왔고 내면의 원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로마가 아닌 다른 지역의 개별 교회에 대해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전례는 계통 별로 크게 동방 전례와 서방 전례로 나뉜다. 동방 전례는 학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13 정도의 전례 전통으로 분류되나[1], 서방 전례는 존재해 오던 6 정도의 전례가 세기부터 존재해온 로마 전례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교회의 의지와 서방제국을 통일하여 로마제국의 거대한 통치를 다시 실현하려고 했었던 황제들의 힘을 통해서 거의 로마 전례’(liturgia romana; ritus romanus)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2] 한국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직접 간접으로 전해준 선교사들이 서방의 로마 전례에 속해 있었고[3] 전례 전통을 전해 받은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자연히 로마 전례에 속하게 되니, 우리 전례는 로마적이기 이전에 로마 전례이다.

 

가지 흥미로운 점은, 트리엔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 전례 개혁의 결과로 미사경본(MR1570) 반포하면서 비오 5 교황께서는 200 이상의 전통을 지닌 개별 교회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전례 전통을 따를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셨으며[4], 이에 따라 공의회 직후에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굵직굵직한 교구들(예를 들어, Rouen, Metz, Treviri, Bamberg ) 자신들의 고유한 전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로마 전례 전통에 대한 깊은 연구와 통찰을 통해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서방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던 모습을 있다.[5] 한편, 이들 지역의 200 이하의 전통을 지닌 교구들도 공의회 직후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전례 상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그들의 성숙한 전례 전통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자신들만의 전례서를 따로 발간하는 나름대로의 전례를 꾸려 나갔는데[6], 비록 이것이 공의회의 결정에 위배되는 모습이기는 하나 내면에 담고 있었던 많은 좋은 점들이 후에 2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하는 방향과 많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보아야 하며 옳고 분별력 있게 평가해줄 일이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이제 20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 고유의 전례 전통을 꾸려나갈 법도 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전례적 상황이, 전례가 지니고 있는 성사적 본성으로부터 그러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로마 전례의 역사는 세기부터 시작하여 2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개혁(reformatio) 이루어 왔으며 전례사(典禮史) 자체가 (forma) 형에 대한 혁신(reforma) 축이 이루어 내는 변증법적인 개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7] 그리고, 본문에서 따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개혁은 전례의 본질을 구현해 내는 성사성(聖事性; sacramentalitas) 직결되어 있으며, 그래서 로마 전례는 로마 이외의 지역에 있는 개별 교회에 대하여도 이러한 개혁을 이미 본성상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로마 교회가 개혁을 시도하고 유럽의 개별 교회들이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전례 전통을 만들어 나가려는 여러 시도들을 하였던 것은 그저 뭐든지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려는 자유분방의 맹목적 진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재현하려 하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오래된 전례 전통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신자들의 구원을 바라는 교회의 자부적(慈父的) 사랑이 성숙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로마 전례 전통의 본질적 통일성을 유지하며 이루어낸 결과물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8]

 

이제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시작해 보자. 로마 교회는 전례를 끊임없이 개혁해 왔는가? 그리고 그런 부단한 개혁이 필요했는가? 로마 전례는 개혁을 어떻게 이루어 왔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전례’가 무엇이기에 본성상 부단한 개혁(reformatio) 요구하며 개혁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라는 전례 자체에 대한 의문부터 접해야 한다.

 

1.       전례신학적 토대로부터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이사 52,7]

 

구원을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온통 기쁨과 감격의 정서로 가슴이 벅차오는 말씀이며 참으로 복된 소식 복음’(evangelium)이다. 그런가?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해방을 알리기 때문이며,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생명을 선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애타게 갈구하며 고대하는 사람에게 구원 받았음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필요할 때에 그것을 얻게 느끼는 감격이며 감격이 죽어가는 사람을 용솟음치게 만드는 은총과 생명의 힘을 일으킨다. 하지만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래서 갈구하지 않거나 혹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제시한 어떤 것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때에는 이러한 감흥 없다. 그렇다면 전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우리는 전례를 필요로 하는가? 전례란 무엇이며 필요한가?

 

전례는 의미가 너무도 넓고 깊어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다. 가능한 많은 정의 중에 전례의 공공성과 규범성[9] 가리키는 가지는, ‘전례란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엄중하고 공적인[10] 경신례(cultus)로서 교회는 예식(ritus) 절차(ordo) 기도문(formula) 교도권의 권위로 반포한 전례서’(liber liturgicus) 통하여 정하여[11] 놓았다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례가 아닌 기도나 예식은 교회 신비체의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서 바치기는 하지만 전례서를 통하여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서 신심행위’(pium exercitium)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십자가의 ”, “묵주 기도”, “삼종 기도”, “성모의 등은 교회 내에서 바치는 예식이기는 하지만 예식 절차와 기도문이 전례서를 통하여 규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전례가 아니다. 신심행위는 전례만큼의 중요성을 지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없다. 위에서 예로 십자가의 ”, “묵주 기도”, “삼종 기도 보더라도 전례가 아닌 기도들이, 때때로 교황 성하께서 친히 주례하실 정도로 중요성과 공적인 가치를 교회 안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다고 있다. 때문에 S. Marsili라는 전례학자는 이러한 것들을 단순히 전례가 아닌 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 안의 경신례(il culto nella Chiesa)라고 불렀으며, 반면에 전례는 교회의 경신례(il culto della Chiesa)라고 불렀다.[12] 명명은 전례가 아닌 기도와 예식들의 가치를 옳게 드러내면서도 전례가 지니는 독보적 존엄성을 유지해 낸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culmen)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fons)이지만 전례가 교회 활동의 전부는 아니며, 정점이요 원천인 전례를 둘러싼 여러 교회 활동 중에 신심행위와 개인기도가 존재하는 것이다.[13]

 

전례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적인 경신례이며, 경신례(cultus) 이상 하나의 반복되는 ’(forma) 필요하며 반복을 통한 상승 체험과 형이 최선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전제된다.[14] 그런데 이런 경신례가 필요한가? 이제 그리스도교 경신례가 무엇이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무엇 대한 질문이 다른 차원에서 다시 대두된다. 여기에 전례신학적인 토대의 제시가 필요하며, 이러한 토대는 1800년대 유럽 계몽주의(illuminisimus) 분위기 속에서 전례를 이성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시도들로부터 태동하게 되는 전례학, 특히 중에서도 전례신학에서 탐구되었으며 영향은 1900년도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났던 전례운동(movimentum liturgicum)[15]에로까지 이어지고, 거기에 담겨 있던 전례 신학은 전례운동을 철저히 비평하고 수용한 비오 12 교황의 회칙 Mediator Dei(1947.9) 반영되어 마침내 전례공의회라고 불리는 2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I, 1962-65) 촉발하였으며 전례헌장에서 비로소 공적인 결실을 보게 되니, 결국 이것은 전례헌장 전체가 담지 하고 제시하고 있는 전례신학이다. 이제 이것을 설명해 보자.

 

2.       전례의 필요성 - 전례 안에 신비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다.

 

앞서 구원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전례가 필요한가? 전례에 참석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전례에 참석하는 인간이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전례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구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이시고 초월적인 분이시며 그분께서 내리시는 구원 은총 또한 초월적인 것인 반면에 그것을 받아들여야 인간의 감각은 유한한 것이라는 모순이 커다란 벽처럼 막아서 있다. 유한한 인간의 인식이 스스로 초월적인 은총에 다다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어 당신 은총을 유한한 방식으로 알려주시는 말고는 달리 인간이 은총에 다다를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경우에도 은총의 인식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한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일단 은총의 전달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달리 어떻게 있는 것도 아니며 이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므로 가능성 안에서 인간적인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것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인간적인 방식으로라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은총에 대한 초월적 인식에로까지 점진적으로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하며 초월적인 구원 은총에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도 불가능하므로 결국 아무런 구원론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께서 유한한 방식으로 내려오셔야 하며, 그렇게 하여 일단 인간과 소통하기를 시작하시고 시작된 것을 점진적인 방식으로 계속하셔야 하며, 급기야는 인간을 당신의 초월성에로까지 다시 이끌어 올리셔야 한다. 이것을 영이신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토대로 하는 성령의 활동으로 묘사하자면 성령 강림’(evpi,klhsij) – ‘성령 동반’(para,klhsij) – ‘성령 승천’(avna,klhsij)이라고 있을 것이다.[16]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알려져서인간이 신앙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 깨달음으로써, 적어도 인간 편에서는, 비로소 은총의 힘으로 효력을 발휘하며 은총의 샘으로부터 길어온 생명의 힘으로 지상의 삶에서부터 이미 영원한 구원을 미리 맛보며 살아갈 있게 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이 알아들을 있는 다양하면서도 점진적인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시며 구원을 알려주셨다’.

 

A.      성령 강림과 성령 동반

 

제일 먼저 하느님께서 하신 계시 행위는 창조’,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일이다. 창조 직후에는 온갖 자연 현상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주셨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자연과 현상을 인간의 감각을 통해 인식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에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소통하셨는데 바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인간의 언어 당신의 구원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는 결정적인 방식으로서, 하느님이 아닌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직접 사람이 되시어우리를 만나러 오셨고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으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목숨까지 바치며 알려주셨다. 인간 구원을 위해 수난 받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파스카 사건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극치에 달하며 완성된다.

 

B.       성령 승천

 

하지만 하느님의 알려주심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적인 한계에 갇혀 있다는 제약이 항상 존재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세상은 그분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알아볼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식 뿐이며 그래서 결국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초월적인 은총을 인간에게 전해주시기 위하여 먼저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소통을 시작하신 것은 인간적인 수준에 영원히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을 초월적인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제자들을 꾸준히 가르치고 이끌어 오신 주님께서는 때가 이르러 인간적인 현존으로 인간과 소통하던 것을 그만두시고 소통을 원래의 목적대로 초월적이고 영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신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당신의 죽음과 승천을 통하여 지상에서의 인간적 현존을 영원히 지워버리셨다. 이것을 성서는 주님의 떠나감으로 묘사한다.[17] 주님의 떠나감 순전히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고 알아보는 수준이 인간적 차원에서 초월적 차원으로 변화하는 극적인 사건을 가리킨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지상의 방식으로 인간을 만나시던 것을 천상의 방식으로 계속하시는 것이며,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pneu/ma)으로 바꾸시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이다.[18] 그러니 이별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보다 높고 완전한 차원에서의 재회 위한 것이다.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이르셨던 말씀이 이를 반향 한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물어 보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요한 16,16-24]

 

말씀을 들을 제자들은 여전히 인간적 방식으로 주님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때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이고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내려오시기 전이었다. 그래서 초월적 만남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떠나신다는 말에 걱정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주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것이며 그것은 여인이 해산하는 것과도 같이 극적인 일이다. 이상 지상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게 제자들은 영적인 방식으로 천상의 주님을 만나게 것이며 그때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소통할 때의 제약이 모두 사라져 영이신 하느님을 영적으로 알아 뵙고 주님의 초월적인 은총을 초월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온전한 수준의 소통이 이루어질 것이어서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재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이 강림하시면서 현실로 이루어진다. 초월적인 은총을 인간이 초월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시어 통교를 시작하신 것이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이 되신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여 인간과 함께 소통하신 것이 주님의 죽으심과 승천까지라면 승천 이후의 성령 강림은 인간과의 소통을 다시 초월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신 사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창조와 성자의 육화가 성령 강림 해당하며,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은 오히려 성령 승천 해당한다. 성령 강림 사건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강 사건이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을 점진적으로 이끌어 성령 동반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여 이제 초월적이고 영적인 수준으로 넘어가 버리는 극적인 상승 사건이며 그래서 성령 승천 사건이다.

 

C.       예식 행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

 

인간 편에서 성령 승천 겪고 받아들인다는 다는 것은 매우 극적이고 어려운 일이다. 동안 해오던 대로 인간적으로 주님을 만나던 일을 그만두고 생소한 영적인 방식의 만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새롭고 영적인 방식으로 만날 그분이 전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만나왔던 예수님이라고 확인할 있겠는가? 그것은 새로이 영적으로 만나는 그분의 모습 안에서 전에 인간적으로 만났던 예수님을 기억해 내는방식으로 가능해진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스카 사건을 이루시고 승천하시기 전날 밤에 하나의 식사 예식 몸소 제정하신 제자들에게 앞으로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억하라 명하셨다. 식사 예식은 그리스도교의 번째 전례로서 모든 성사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후에 성찬례혹은 미사라고 불려질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영적 만남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켜 두셨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이끄시는 교육 방식의 특징 중에 두드러지는 것은 먼저 친히 모범을 보이시고 제자들이 모범에 따라 처음 시도할 때에 동행하며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성찬례를 친히 행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 직후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성찬례를 통해 처음으로 주님을 영적으로 만나도록 도와주셨다(루카 24,13-35). 제자들이 길에서 주님을 만났으나 그분은 이미 영적으로 현존하시는 분이셨고 그래서 그분이 주님이심을 인간적인 방식으로는알아보지 못하였다.[19] 주님께서는 먼저 성경의 말씀을 풀이해 주시며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여 새로운 현존으로 제자들을 만나신다는 사실을 설명해 줌으로써 절망과 두려움으로 닫혀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고 그렇게 제자들의 인간적 감성들이 초월로 열릴 있도록 준비시키셨다(루카 24,32: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렇게 준비된 제자는 그날 저녁 주님께서 식사 예식 거행하실 때에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예식 거행을 통하여 인간적 감각이 초월로 열려 급기야 그분이 예수님임을 기억해내었던 것이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루카 24,30-31]

 

부활 이후의 예수님께서는 이전의 인간적 현존이 아니라 초월적인 현존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을 보아도 예수님이라고 알아 수가 없었으나 주님께서 행하신 예식 통하여 그분이 예전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만났었던 그분이라고 기억해 내게 되며, “ 예식이란 구체적으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고’, 그것을 쪼개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는것이다.[20] 예전에는 그분을 인간적으로만 알아들었지만 이제 예식 통하여 초월적으로 그분을 만나고 그분이 예전의 그분임을 확인하게 때에는 인간적인 제약을 뛰어 넘어서서 그분과 소통하게 된다. 주님의 본래 모습은 초월적이어서 인간 감성의 한계 안에서는 접근할 없고 감추어져 있지만, 성령의 은총으로 인간의 감성이 초월적인 지평에로 열리게 되면서 그분의 모습을 영적으로 알아보게 되니 이것을 신비’(mysterium)라고 부른다. 초월적인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적으로 준비되어야 하고 신앙으로 응답하여야 하니 신비를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라고 한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 이후 성찬례를 체험을 이래로, 성령을 받아 주일 성찬례를 거행했던 사도들은 그때마다 성찬례 안에 신비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기억해내고 초월적으로 그분을 만났을 것이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지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예식을 행함으로써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신앙의 은총 안에서 영적인 신비 파스카 신비의 모습으로(SC 2)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SC 7). 성찬례를 제정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루카 22,18) 하셨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를 통하여 주님을 신비롭고 영적으로 만나는 것은 세상 끝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최종적인 것이며 이후 구원 역사의 다른 단계는 없으리라는 뜻이다.[21] 구원 역사의 마지막 단계는 주님의 죽음-부활-승천-성령강림 바로 다음부터 이어져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는 시기이며, 시기는 신비이신 예수님 예식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전례의 시기이고 우리는 바로 시기를 살고 있다. 오늘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이는 전례 안에서 신비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그분을 영적으로 만나야 한다.[22] 그런데 그런 초월적인 만남과 체험이 우리에게 생명의 힘과 구원의 은총을 주는 것이고 그것을 갈구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전례 안에서 그러한 체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해 지는가?

 

3.       인간 감각의 성화와 구원 은총의 인식 - 전례의 본질인 성사성

 

전례에 참석하는 이는 ‘인간’이며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받고자 하는 이도 ‘인간’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고 은총을 내려 주셨다면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알아듣게 되고 그래서 은총이 비로소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는가? 인간은 매사에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인간적인 감각’(sensus humani)으로 알아듣는다. 인간이 구원 은총을 알아듣는다면 역시 인간적인 감각을 통하는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총은 초월적인 것이어서 제한적인 인간의 감각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면 전례 안에서 은총은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되는가?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당신의 수난을 대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려고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때 그분의 모습이 해처럼 빛나고 하늘에서 성부의 음성이 울리는 것을 제자들은 들었다.[23] 이것은 제자들이 이전에 본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었던 그런 모습이요 소리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예전에는 빛나지 않았었는데 그때만 잠시 빛난 것이고 성부께서도 그때만 잠시 말씀하신 것인가? 여기서 진정 깊이 물어보아야 것은 참으로 바뀐 것이 예수님의 얼굴인가 아니면 제자들의 시각인가 라는 물음이다. 빛나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지니고 계셨던 신적인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얼굴이 영광스러웠다가 영광스럽지 않았다가 하면서 바뀔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다. 다만 제자들의 눈이 인간적인 감각의 제약으로 인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적 감각이 성화(聖化)되어 비로소 예수님의 초월적인 본래 모습을 있게 것뿐이다. 하느님께서 바꾸신 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었으며,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변모한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의 눈이 초월적으로 변한 사건이다.[24]

 

전례 안에서 인간은 먼저 인간적인 감각들을 통하여 구원은총의 인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며 하느님께서 감각들을 소중히 다루어 주시며 성령의 은총으로 그것을 성화하여 초월적인 차원으로 열어주신다. 전례에 참석하는 인간이 있는 ‘적극적인 노력’이란 것은(SC 14) 성령의 능동적인 활동하심에 자신의 감각을 내어 맡기는 수동성에 대한 적극성이다. 그저 전례 안에서 무언가를 하기 위한 맹목적인 적극성은 회중(assemblea) 신자들을 지치게 만들고 결국 공허한 실패로 이어질 뿐이다. 회중이 전례 안에서 응답하고 환호하고 노래하고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에 최대한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고 그래서 은총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한 적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회중이 그렇게 있도록 미리 알아서 배려하고 봉사해야 하는 것은 전례 직무자들의 몫이다.

 

이러한 은총의 체험은 전례에 대해 알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행하는’ 수준에서 가능한 것이다 (SC 34). 전례는 무엇을 설명하는 학교가 아니라 초월적인 구원 은총을 직접 느끼는 신비 체험의 장이다. 전례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례에 대하여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은, 곧바로 느끼고 은총의 힘으로 초월에로 열리려 하는 인간의 감성을 괴롭게 만들어 버린다. 전례 중에 해설은 절제된 방식으로 필요한 부분에만 이루어져야 한다. 서슴없이 마이크를 통해 신자들에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해설하기 보다는 되도록 침묵 중에 신자들을 인도하고 안내하며 성가를 선창하고 먼저 모범적으로 움직여서 신자들의 전례 동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며 필요할 때에만 최소한의 언급으로 신자들을 도와주는 것이 좋은데 모든 것이 ‘animator’ 임무에 속한다. 만일 올바른 전례 참석을 위해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쳐야 한다면 그것은 전례준비의 단계에서 해야 일이지 전례 중에 것은 아니다. ‘전례 사목’(pastoralis liturgica) 측면에서 사목자들은 신자들의 이런 인간적인 감성을 소중히 배려해 주어야 한다. 전례 중에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인간적 감성들이 성령의 은총으로 성화되어 초월적 차원에로 열릴 있도록 온갖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적인 감성은 그저 제약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순수하게 인간적이기만 것이 아니라 초월적 차원으로 성화되어 구원의 은총을 인식하게 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에 전례 안에서 그리고 우리 일상 안에서 성사성을 구현해 있는 열쇠가 있다. 예를 들어 파스카 신비이신 예수님께서는 전례 안에서 무엇보다도 말씀과 성체의 형상으로 현존하시며(SC 47-58) 이것은 먼저 ‘성경’과 ‘성체’라는 모습으로 인간의 시각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에 성령의 은총으로 신앙 안에서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의 현존으로 보이게 되며 ‘성체’ 역시 단순한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으로 인식됨으로써 신비 안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기 이전에 우선 하나의 책인 ‘성경’이 인간의 시각에 비추어지는 모습에 대해서도 합당하고 소중한 배려가 요구되는 것이며, 이렇게 ‘초월을 지향하는 인간적인 배려’가 결국은 신자들의 영적인 유익에까지 관계된다. 그런 이유로 말씀 전례 중에 복음집(evangeliarium) 제단 가운데에 모셔두며 성체와 동등한 존엄함으로 대하는 것이다(cfr. IGMR2008 122; 173).

 

한편, 이러한 인간 감성의 성화 영성체에 대한 물리적이고 생리학적인 이해에서 보이는 오류와는 확연히 다르다. 예를 들어, 성체는 마리아가 낳은 예수의 바로 육체이며 내가 성체를 영하면 예수의 육체가 속에 들어와 소화되어 체내에 흡수됨으로써 생리적으로 예수님과 내가 몸이 된다는 그런 식의 설명은,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 초월적 차원으로 이끄시는 성령의 은총과 이끄심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신앙이라는 본질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고 성사와 객체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25] 그래서 이런 식의 이해와 접근으로는 인간이 초월적인 구원 은총을 느끼고 은총의 힘으로 참된 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례 안에서 신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각으로 신비에 접근하며 성령께서 제한적인 감각들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초월적인 차원으로 성화시켜주신다. 전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불변하고 초월적인 신성에서 비롯되는 구원의 은총이지만 은총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는 인간의 제한적인 감각들이며 인간적인 것들은 시대와 지역과 문화적 환경에 따라 가변적이다 (SC 21). 전례의 본질이 인간의 구원 체험이라는 성사성이고 성사성이 가변적인 인간의 감성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전례는 본성적으로 각각의 변화된 인간적 환경에 알맞게 적응’(adaptio; adattamento)하면서 자신의 (forma) 부단히 혁신(reforma) 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SC 38). 로마 전례의 역사 전체가 바로 이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혁신은 시대에 따라 요구되기도 하지만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도 요구되며, 모든 것이 성사성이라는 지평 위에서 인간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전례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본질인 성사성을 항상 구현해 내기 위해서는 문화인류학(anthropologia culturalis) 기초한 신학적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4.       문화인류학(anthropologia culturalis) 기초한 신학적 접근

 

1962 프랑스 신학자인 마쏭(J. Masson) 처음으로 ‘inculturatio’/‘inculturare’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26], 1979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육화하셨듯이 그리스도교의 신앙도 다른 문화(cultura) ‘안에’(in) 그렇게 육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in-culturatio’라는 개념을 교회 공문서를 통해 제시하셨는데[27], 이후로 수많은 신학자들이 개념을 사용하였다. 우리말로 용어를 흔히 토착화’(土着化)라고 옮기지만, 우리말 토착화 차라리 ‘indigenizatio’ 가까우며 이것은 ‘inculturatio’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28] 문화인류학에서는 ‘inculturatio’ 문화이입’(文化移入) 또는 문화화’(文化化)[29]라고 옮기는데 토착화라는 말보다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토착화라고 하는 inculturatio 개념에서 흔히 간과되는 점은, 이것이 문화와 문화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개인과 문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하나의 문화 안으로 이입되어 완전히 문화에 소속되고 문화가 바로 자신의 문화가 되는 그것이 바로 inculturatio이며, 이것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 때에 이것은 하나의 숙명이다.[30]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일단 한번 한국 문화에 이입된 이상 이탈리아에 가서 아무리 오랜 햇수를 살고 스파게티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이태리 문화에 이입될 없으며 여전히 이방인으로 남을 뿐이다.

 

이렇게 개인이 문화에 이입되는 것이 inculturatio인데, 개인 문화의 상황에서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여러 문화 안에 이입되어 완전히 문화와 하나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문화에로 전해질 때에 말씀이신 성자께서 처음부터 몸을 지니고 계시지 않았던 것처럼 기존에 지니고 있던 문화적 요소들을 벗어버린 오로지 ‘신앙’이라는 알몸으로 다른 문화라는 ‘옷’ 속으로 들어갈 있는가? 신앙은 그것이 무릇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구원의 체험이요 삶인 이상, 신앙은 신앙사상이 아니라 ‘신앙생활’이요 종교는 종교이념이 아니라 ‘종교생활’이며 인간의 삶은 문화를 이루니 결국 종교생활은 ‘종교문화’가 된다. 종교문화에서 종교문화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문화적 요소를 신앙만 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뭔가 덧붙여져서 것을 보지 못한 것일 있다.[31] inculturatio 개념에 따라 외방선교를 경우, 문화적 요소를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다른 문화에 전하고 심고 뿌리내리고 자라나게 한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와 신앙 생활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문화인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인식조차 하지 못한 실패의 결과들만 놓고 의아해 하게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신앙인의 자체이고 그래서 종교문화 자체라면, 다른 문화에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신앙생활을 전한다는 것은 유럽 그리스도교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충돌하는 상황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개인과 문화의 관계인 inculturatio 상황이 아니라 문화와 문화가 서로 충돌하는 ‘문화접변’(文化接變; acculturatio)[32] 상황인 것이며, 모든 인간이 다양하지만 인간으로서 동등한 이상 인간의 삶이 만들어 내는 여러 다양한 문화들 또한 본질적으로 서로 대등하다. 그리스도교 문화와 다른 문화가 충돌하는 상황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빚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올바로 인식하며 접근할 때에 비로소 합당한 해결책들이 찾아질 있을 것이다. 재의 수요일이 설날과 겹친 적이 있었다.[33] 만일 inculturatio 개념대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아무런 문화적 요소 없이 한국 문화에 이입해 들어왔다면 아무런 문화적 충돌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재의 날이고 설날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흥겨운 축제일 하나이니 바로 이것이 ‘문화접변’으로 인한 충격이며, 하나의 단적인 예에서도 inculturatio 개념이 틀렸음이 증명된다. 이때 한국천주교회에서 교구별로 내린 해결책들은 흥미로웠다. 설날인 재의 수요일 당일에 지켜야 했을 단식과 얹는 예식을 이어지는 금요일 혹은 주일로 이동한 교구들이 있었다.[34] 전례사에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날은 원래 사순 1주일이었는데, 주일은 단식을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기에 단식으로 사순절을 시작하려는 목적에서 그에 앞선 금요일 혹은 수요일에 단식을 하였고 재를 뿌리는 예식이 성행함에 따라 점차 재의 수요일이 사순절의 시작일로 고정된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사순절의 원래 시작일인 사순 1주일로 단식의 재를 옮김으로써 문화충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과정에서 우리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 양쪽을 동등하게 다루려고 애썼으니 이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 방법에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될 일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무런 문화충돌 없이 우리 한국문화와 동화되리라는 inculturatio 환상부터 버리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한국문화의 옷을 입히겠다는 것이 바로 환상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하나의 생활이요 문화이며, 신앙의 문화와 한국 문화는 문화인 이상 서로 ‘동등’하며, 사이에서 수많은 충돌이 빚어질 것임을 인정하고,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하나씩 방안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옳은 태도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려는 노력이 수백 이상 계속되면 자연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국 문화와 조화된 신앙생활로 그리스도교 문화로 변모되어 있을 것이다. 유럽 문화 안의 그리스도교 문화처럼 말이다. 이것이 ‘문화변용’(文化變容; transculturatio)이며, 우리에게 추구해야 목표점이 있다면 바로 ‘한국 문화 내에서의 그리스도교 문화의 점진적인 변화’일 것이다.

 

유럽에서의 그리스도교 문화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하는 것은 바로 로마 전례의 역사를 통해서도 살펴볼 있다. 경신례의 특성상 하나의 (forma) 전제하게 되며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따라 형을 부단히 혁신(reformatio) 것이 전례사다.

 

5.       로마 교회의 전례 개혁

 

유대교 전통에서 그리스도교의 탄생 자체가 이미 개혁이며 개혁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35] 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례는 회당의 유대교 전례로부터 영감을 받는 외에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헬레니즘이라는 문화적 환경으로부터도 여러 요소들을 변형하고 적응시켜 받아들이게 된다. 어떠한 고정된 형이 아직 없었던 시기이므로 사려 깊은 자유로움이 충만하였으며 이러한 자유로움이 가득한 변화와 적응의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통과 신앙의 정통성은 항상 철저하게 지켜져야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하나 차차로 고정화되어 갔고 로마 제국시기에 들어서면서는 드디어 이전의 자유로움과는 확연히 다른 ‘로마 전례’(liturgia romana)라는 하나의 고정된 ’(forma) 갖추게 되어 이제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reformatio)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하지만 로마 전례라는 (forma), 로마 제국 시대라는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여 이전에 없었던 형을 새로 만들었다는 점에서[36], 게다가 특히나 전례 언어를 희랍어에서 라틴어로 혁신하였다는 점에서[37] 이미 자체로 하나의 개혁이다. 2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 언어로 라틴어 이외에 모국어도 사용할 있도록 허용한 것은 3-4세기경의 사건에 비추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으며(SC 36), 4세기 이후 형식화된 로마 전례 자체가 이미 전례 언어의 혁신과 함께 생겨났고 이로 인해서 희랍어를 고수했던 동방 전례와 라틴어로 개혁하였던 서방 전례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것이니 이런 혁신에 비하면 기껏 모국어의 허용이란 결코 대단할 것도 없다. 로마 시대의 교회가 전례문을 라틴어로 옮기는 과정은 매우 신중했으니, 전례문의 번역은 공의회와 학덕이 높은 주교들의 인준을 받아야만 했었다.

 

시대의 요청에 따라 하나의 형이 고정되면, 다시 시대를 거치면서 부족한 점들이 생기게 되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들이 병존하면서 혼란이 초래되고, 그러면 혼란한 상황을 정돈하면서 다시 새로운 형으로 개혁하게 된다. 6세기경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례 개혁이 그러했고[38], 8세기경 카알 대제는 로마 교황청의 전례 예식을 프랑크 왕국 전역에 도입하면서도 지역의 현실적 사정으로 인해 부적합했던 부분을 보충하였으니 이로써 ‘갈리아화 로마 전례’(liturgia romana gallicanizzata)라는 새로운 형이 생기게 되며, 여기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형태로 진행된 공식 전례 개혁의 전형을 보게 된다.[39] 이러한 전례 개혁은 엄선된 전통적 수사본에 충실히 기초한 정확한 비평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는 명확한 사목적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 지역의 개혁의 결과는 10 세기경 오토 대제 시대의 전례 개혁을 통해 오히려 로마 지역으로 다시 유입되며 이때 프랑스 지역에서 성행했던 미신적이고 부정적인 요소들도 함께 들어오게 된다. 이에 미신적 요소들을 없애어 순수한 로마 전례를 보호하고 초세기의 교부들의 지침으로 돌아가려는 의도에서 전례 개혁을 단행한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였으며 결과로 생긴 새로운 형은 Ordo romamus ‘로마 예식’(ritus romanus)이라고 불렸는데,[40] 이것은 이미 갈리아화 로마 전례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로마 교황청 전례’(liturgia secundum usum romanae curiae)라는 형으로 확정되어 진다.

 

이후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 부족함을 채우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다양한 판본의 전례문들이 넘쳐나 과잉상태에 이르게 되니 16세기에 있었던 트렌토 공의회의 전례 개혁이 여기에 응답한다. 공의회의 결정에 따른 후속된 개혁들은(비오 5, 끌레멘스 7, 바오로 5, 우르바노 7) 한마디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여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을 보존하고 중요하지 않으면서 과잉의 상태로 교회의 전례 생활을 무겁게 억눌러 왔던 짐을 덜어낸 것이라고 있으며, 방법은 교부들의 오래된 전통적 지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41] 공의회 이후에도 프랑스 독일 지역 교회들의 독자적인 전례 개혁이 있었으며, 이에 교황청에서 반응한 것이 베네딕토 14세의 전례 개혁이라고 있다.[42]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몽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전례에 대한 학문적 접근 전례학이 태동하게 되고[43] 초기의 전례신학은 1786 이탈리아의 피스토이아(Pistoia) 시노드에서 혁신적인 결과를 낸다.[44] 교황 비오 6세께서는 1794 사도 헌장 Auctorem fidei[45] 통하여 시노드를 단죄하였지만, 시노드에서 제시한 대부분의 요점들이 바로 2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점은 주목해야 사항이다. ‘성당 안에 제대는 하나여야 한다 , ‘전례는 간소해야 한다 , ‘신자들이 주일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점과 이유로 제시된 ‘전례는 사제와 신자의 공동 행위라는 점이 이미 이때 지적되었다. 그리고 ‘전례에서 모국어로 신자들을 인도해야 한다 것과 ‘신자들이 들을 있도록 감사기도를 소리로 명백히 낭송해야 한다 그리고 ‘모국어로 번역된 전례문을 신자들의 손에 들려줄 필요가 있다 , 또한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이 가능한 바로 미사 중에 축성된 성체를 영해야 한다 것도 벌써 언급하고 있다.

 

전례학은 점점 발전했고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전례신학이 전례운동[46]으로 현실화되어 갔다. 전례학의 발전으로 수사본의 연구와 비평본들이 나오게 되었다. 비오 10 교황께서는 전례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전례 음악에 초점을 전례 개혁을 추진하셨는데, 이전의 개혁들이 현실에 대한 맹목적인 ‘적응’(aggiornamento)만을 추구하다 실패했던 점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수사본 연구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시점의 전례를 개혁하도록 지시하셨으며, 이것은 좋은 결실을 내었다.[47] 비오 12 교황께서는 전례운동으로 무르익은 분위기를 엄격하게 비평하고 좋은 점들을 수용하셨고[48] 이것은 드디어 2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으로까지 이어져서 결실을 보게 된다.

 

결언

 

2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은 모든 것을 확정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지침과 방향만을 제시할 따름이다. 이전에 막혀있었던 그러나 길만이 신자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있다고 보이는 길을 뚫어서 이제 방향으로 있다고 길을 열어 놓은 것이지, 방향으로 이만큼만 있다고 하면서 한계를 규정하고 문을 닫아 것이 아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전례공의회의는 하나의 시작을 제시하면서 끝을 맺었을 뿐이며, 참으로 우리 교회는 전례학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이제 시작의 단계이다. 성당 수와 신자 수가 외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여 침체기에 들어설 정도로 성장할 만큼 성장했다. 이제 집이 있고 식구가 있으니 집안을 가꾸어야 하고 식구들을 돌보아야 때이다. 신자수가 명이나 늘었는가에 대한 관심을, 신자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전례에 참석하고 그들의 인간적 감성들이 얼마나 배려되고 있는가 하는 점으로 돌려야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을 보시고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으며 신앙은 사람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셨다.[49] 전례에 참석하여 성령의 은총으로 인간 감성이 초월로 열리고 그래서 신앙의 귀와 눈으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신자 사람이 있는 교회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아무리 교회가 많고 신자수가 많다고 해도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눈과 귀가 막히고 영적으로 마비되어서 신앙의 응답을 없게 된다면 교회는 어디에도 자리가 없을 것이다. 전례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인간적 감성에 대한 사목적 배려와 사랑 때문에, 문화접변의 상황에서 전례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문화충돌의 여러 문제들을 놓고 고민하는 일선 사목자들의 고충은 계속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은 부단히 시도되어야 한다. 전례학 전공자의 수도 많아져야 하며 한국 전례학의 발전과 심화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전례사의 국면이나 로마 전례의 최종적인 겉모습만 보고서 그것을 ‘로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동의할 없다. 참으로 ‘로마적인 것’을 논하자면 처음부터 하나의 개혁으로서 태동한 로마 전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혁신해 내면의 힘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들이 지향하고 있는 ‘인간 감성을 통하여 일어나는 전례적 성사성’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항상 성서와 세기 교회의 전통과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물을 길어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된다. ‘로마적인 것’이라면 바로 이것이 참된 의미에서 로마적인 것이리라. 우리 한국 교회는 로마 전례에 속해 있으며 로마 전례는 본성상 우리 교회에 이런 개혁의 역동성을 요구하고 있고 역동성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이끌어 주심을 느끼게 된다.


 

 

약어 약호

 

AAS                Acta Apostolis Sedis, Roma 1909 ss.

cfr.                   confer;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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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H. Denzinger (ed.) P. Hünermann (ed.), Bologna 32000.

IGMR2008       « Institutio Generalis Missalis Romani », in MR2008.

MR1570           Missale Romanum. Editio Princeps (1570), M. Sodi (ed.) – A.M. Triacca (ed.), Città del Vaticano 1998.

MR2008           Missale Romanum. ex decreto Sacrosancti OEcumenici Concilii Vaticani II instauratum auctoritate Pauli Pp. VI promulgatum Ioannis Pauli Pp. II cura recognitum. Editio typica tertia emendata, Città del Vaticano 3e2008.

NRT                 Nouvelle Revue Théologique, Louvain 1869 ss.

SC                   Sacrosanctum Concilium; 「전례 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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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fr. E. Carr, « Le famiglie liturgiche in oriente », in Introduzione alla liturgia (Scientia Liturgica 1), Casale Monferrato 1998, 26-39.

[2] 서방 전례에서 로마 전례 이외에 Milano 암브로시오 전례와 스페인 전례를 고려할 있지만 현재 거의 명목상 유지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실정이다. Cfr. G. Ramis, « Le famiglie liturgiche in occidente », in Introduzione alla liturgia (Scientia Liturgica 1), Casale Monferrato 1998, 40-41.

[3] 16 세기 중엽 F. Xaverius(1506-1552) 일본에서 선교하였고, 그가 중국으로 가던 사망한 이후로 예수회원들이 중국에서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cfr. A. Franzen, 최석우 , 『세계교회사』, 왜관 2001, 373-376). 1784 2 이승훈 북경에 40여일 머물렀을 북천주당에서 교리를 배우고 예수회 신부인 L. de Grammont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당시 그곳은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관리하고 있었다(cfr. 류홍렬,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서울 1983, 47-48). 이렇게 인연을 맺은 파리 외방전교회로부터 신부들이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이들은 입국하여 전례를 거행하였으니 이리하여 로마 전례가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지게 된다(cfr. 류홍렬, 『간추린 한국천주교회 역사』, 73-75).

[4] Pius V, « Quo primum » in MR1570, 3: “… Omnes et observent, ne in posterum … in omnibus Christiani orbis … Ecclesiis … alias quam iuxta Missalis a Nobis editi formulam decantetur … nisi super ducentos annos Missarum celebrandarum … observata sit …”(이후로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200 이상 미사를 거행하며 준수해온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펴낸 미사경본의 기도문과 다른 것을 바치지 것이다); cfr. B. Neunheuz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Roma 31999, 138.

[5] Cfr. B.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in La Liturgia. panorama storico e generale (Anàmnesis 2), Genova 1978, 242-243.

[6] 실상 프랑스 독일 지역에서 공의회를 통해 교도권이 제시한 전례 규정을 따르는 교구는 오히려 소수였고 80 이상의 교구들이 이러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Cfr.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243.

[7] 사실 서방 교회 자체가 동방 교회로부터 지나치게 개혁적이고 변절된 전례를 이루었다는 비방까지 듣기도 한다. 원래 박해 시대에는 동서방 교회가 서로 긴밀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시기의 교회 모습을 엿볼 있는『사도전승』은 로마 교회의 전례를 묘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동서방이 공유하고 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cfr. 『사도 전승』(교부 문헌 총서 6), 이형우 ,  왜관 1992, 14). 그러던 것이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후원하는 제국 교회 시대에 접어들면서, 특히 서방 교회가 이미 3-4 세기에 전례 언어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바꾸면서부터 동서방의 전례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으니 (cfr. A.J. Chupungco, « Storia della liturgia nei primi quattro secoli », in Introduzione alla liturgia (Scientia Liturgica 1), 119-120) 자체가 하나의 개혁적인 사건이며 1054 동서방의 이교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이러한 알력이 표면으로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8] 우리 한국 교회의 역사가 비록 200년이 넘었다고는 하나, 한가지 인식해야 사실을 들자면, 현재까지 로마 전례 개혁의 최종 결실이라고 있는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 = SC) 제정할 당시(1962.12.9-1963.9.28) 헌장 전반에 대해 논의하고 장의 문구를 확정하기 위한 총회’ (Congregatio Generalis) 표결에 참석했던 투표자의 명단(H. Schimidt S.J., La Costituzione sulla Sacra Liturgia, Roma 1966, 366-376),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에서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아시아 지역에서도 필리핀 교회와 심지어는 일본 교회에서 이들의 이름도 발견할 있지만 우리 한국 교회에서 참석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불과 40 전의 우리 교회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전쟁 직후의 혼란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없었으리라고 추측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음은 여전하다.

[9] 전례를 규범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편리한 측면도 있지만 전례의 본질을 간과하게 만드는 단점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례의 엄중한 규범성을 소홀히 여겨서는 된다. 공공성과 규범성은 무릇 그리스도교의 전례뿐만이 아니라 모든 경신례(cultus) 기본 요건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0] 개인 기도는 전례가 아니며 전례는 교회론적 신비체의 공적인 예배이다. 그러나 전례에 공적인 성격이 있는 것이지 공적인 것이 전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례가 전례이게끔 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전례가 교회 공동체의 경신례라는 점과 경신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드러난다는 점이며, 본질적인 요소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최선의 (forma)으로 표현되어 거기에 참여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보다 쉽게 신비에 접근하게 한다. 본질적인 요소들 전례가 교회의 경신례라는 점에서 전례의 공적인 성격이 나오는 것이다.

[11] 근본적으로 교회는 전례를 제정하고 규정하는 (constituire) 아니라 이러 이러한 것이 전례라고 선언하는 (declarare)이다. 전례는 교회가 행하는 것이지 교회가 만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리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는 세부적인 규정으로 나타나게 되며 형을 바꾸게 때에 규정들도 다듬어지고 개선된다.

[12] Cfr. S. Marsili, « Liturgia e non-liturgia », in Liturgia. Momento nella storia della salvezza (Anàmnesis 1), Genova 1979, 137-156. Marsili 어떤 신심행위들이 역사적으로 이교적이며 미신적인 경향을 띠어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었지만, 반면에 삼종기도와 묵주기도 같은 신심행위들은 원래가 전례, 시간 전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직자들이 라틴어로 바쳤던 전례를 평신도들이 쉽게 접근할 있도록 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며 기본 구조도 시간 전례와 동일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신심행위는 교회가 그것을 전례로 선언하지 않았을 사실상 전례와 구분하기 어려우며 전례가 지니는 본질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어서 법적인 측면이 아니라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전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3] 「전례헌장」 9-13 참조.

[14] Cfr. C. Valenziano, Liturgia e Antropologia, Bologna 1997, 28-34.

[15] Cfr. Neunheuzer, « Movimento liturgico », in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158-165.

[16] Cfr. A.M. Triacca, « Spirito Santo / II », in Liturgia, D. Sartore (ed.) – A.M. Triacca (ed.) – C. Cibien (ed.), Milano 2001, 1903: A.M. Triacca 전례 안에 존재하는 가지 성령 지평’(dimensioni pneumatiche)으로서 하강 지평’(dimensione discendente), ‘동질 지평’(dimensione omologetica), ‘상승 지평’(dimensione ascendente) 언급한다.

[17] 루카 24,51: “…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요한 16,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사도 1,11: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

[18] Cfr. O. Casel, il mistero del culto cristiano, B. Neunheuzer (ed.) – A. Manzino (tr.), Roma 1985, 45.

[19] 이는 주님의 죽음 이전에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예수님이라고 인간적으로알아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인간적으로 그분을 알아볼 그분이 하느님이라는 초월적 인식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는 제자들과 성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가지 예외가 있다. 하나는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건(마태 16,16; 마르 8,30; 루카 9,29)인데, 이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인식이 사람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외적이고 순간적으로 초월적인 고백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사건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다룰 것이다.

[20] 교회는 가지 동작이 예수님께서 당신을 기억하기 위하여 행하라고 하신 예식에 해당한다고 해석하였고, 그래서 가지를 성찬례의 제정적 요소라고 한다(cfr. E. Mazza, « l’Eucaristia nei primi quattro secoli », in l’Eucaristia (Scientia Liturgica 3), A.J. Chupungco (ed.), Casale Monferrato 1998, 30). 제정적 요소들 찬미를 드리는 신명 8,10(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좋은 땅에서 온갖 좋은 것을 배불리 먹은 너희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다) 계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계명은 유대교 전통에서 식사를 하나의 예식으로 만들어주는 신학적인 토대가 되며, 찬미’(euvlogi,a; benedictio)/‘찬미를 드리다’(euvlogei/n; benedicere)라는 용어는 후대에 감사’(euvcaristi,a; eucharistia)/‘감사를 드리다’(euvcaristei/n; gratias agere)라는 용어로 대체되기도 한다(Cfr. E. Mazza, La celebrazione eucaristica. Genesi del rito e sviluppo dell’interpretazione, Bologna 2003, 17-37). 음식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좋은 것이니 이미 거룩한 것이며, 음식을 먹을 때에 기도를 바치는 것은 음식을 정화하거나 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리기 위한 것이고, 찬미의 동기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좋은 것에 대한 감사이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고 그분을 찬미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수락함을 의미한다(cfr. Mazza, La celebrazione eucaristica, 23).

[21] Cfr. Mazza, La celebrazione eucaristica, 31.

[22] Cfr. Casel, il mistero del culto cristiano, 25-34.

[23] 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24] Cfr. C. Valenziano, « Vedere la Gloria », in L’uomo della Liturgia, A. Grillo – C. Valenziano, Assisi 2007, 119-120.

[25] Cfr. E. Mazza, Continuità e discontinuità. Concezioni medievali dell’eucaristia a confronto con la tradizione dei Padri e della liturgia, Roma 2001, 49-50, 58-60: Pascasius Radbertus(790-865)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성사적 실재론’(realismus sacramentalis)이라 부르며 주장하였으나, 그는 교부들의 문헌을 올바로 이해하고 정확히 인용하지 않고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하여 이용하였다.

[26] J. Masson, L’Eglise ouverte sur le monde, NRT 84 (1962) 1038.

[27] Ioannes Paulus II, « Catechesi Tradendae », n. 53, AAS 71 (1979) 1319.

[28] Cfr. D.S. Amalorpavadass, Towards Indigenisation in the Liturgy, Bangalore 1971, 26-53. 1970년대에 D.S. Amalorpavadass 인도 문화에 대한 전례의 적응을 정의하기 위하여 ‘indigenis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문화의 토종’(土種; indigena) 되도록 전례를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개념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외부에서 유입된 것은 어떤 것도 결코 토종이 없으며, ‘inculturatio’ 언급한 요한 바오로 2세도 복음 말씀이 문화적 토양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는다고 했다(cfr. Ioannes Paulus II, « Catechesi Tradendae », n. 53; A.J. Chupungco, « liturgia e inculturazione », in Liturgia fondamentale (Scientia Liturgica 2), Casale Monferrato 1998, 349-350). 우리 나라에서 토착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주로 ‘indigenisation’ 개념으로 이해되는 듯하다. , ‘토착화 작업 한다고 때에, 유럽에서 들어온 로마 전례를 우리 문화의 토종으로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29] 이문웅, 「제11 문화와 퍼스넬리티」, 한상복 이문웅김광억 공저, 『문화인류학개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서울 22010, 315-316 참조.

[30] M.S. Garbarino, 한경구 임봉길 공역, 『문화인류학의 역사』, 일조각, 서울 22007, 4 참조.

[31] 야고 2,14-26 참조: “…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32] 이문웅, 「제15 문화변동」, 한상복 이문웅김광억 공저, 『문화인류학개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서울 22010, 404-407; Garbarino, 『문화인류학의 역사』, 110-111 참조.

[33] 2005 2 9 우리 문화에서 해의 시작인 설날이자 그리스도교 문화에서는 사순절의 시작일인 재의 수요일이었다.

[34] 예를 들어, 대구 대교구는 재의 수요일의 금육과 단식을 관면하였고 얹는 예식을 이어지는 금요일에 거행하였으며, 안동 교구는 재의 수요일의 금육과 단식을 관면하는 한편 사순 1주일에도 얹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춘천 교구는 재의 수요일의 금육과 단식을 관면하고 대신에 이어지는 금요일에 금육과 단식을 지키도록 권장하였다. 의정부 교구와 부산 교구는 재의 수요일의 금육과 단식을 완전히 관면하였다. 한편, 1985 2 20에도 같은 상황이 발생했으며 그해 2 17일자 『가톨릭신문』에는 한국주교단이 재의 수요일의 금육과 단식을 관면하였으며 세부지침은 교구마다 다르다고 나와 있다. 1999 2 17 재의 수요일과 설날이 겹쳤으며 교구별로 금육과 단식을 관면하였다.

[35] Cfr. A.J. Chupungco, « Storia della liturgia nei primi quattro secoli », in Introduzione alla liturgia (Scientia Liturgica 1), Casale Monferrato 1998, 113-117.

[36] Cfr. B.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in La liturgia. panaorama storico generale (Anàmnesis 2), Genova 1978, 228.

[37] Cfr. E. Cattaneo, Il culto crisitano in occidente. note storiche, Roma 1992, 55-71.

[38] Cfr. Cattaneo, Il culto crisitano in occidente, 107-113.

[39] Cfr.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229-233.

[40] Cfr. Cattaneo, Il culto crisitano in occidente, 200-207

[41] Cfr.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240.

[42] Cfr. Neunheuzer, « le riforme della Liturgia romana: storia e caratteristiche », 244.

[43] Cfr. B. Neunheuz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Roma 31999, 147-151.

[44] Cfr. Cattaneo, Il culto crisitano in occidente, 435-154.

[45] DH 2600-2700.

[46] Cfr. Neunheuzer, Storia della liturgia attraverso le epoche culturali, 157-165.

[47] Cfr. M. Righetti, Introduzione generale (Storia liturgica 1), Milano 1964, 678-684.

[48] 비오 12세가 1947 11월에 반포한 회칙 Mediator Dei(DAILS 1865-2068) 전례 운동에 대한 결론이라 있다.

[49] 마태 16,13-20; 마르 8,27-30; 루카 9,18-21.

 

전례의_성사성과_전례_개혁-신호철 비오 신부.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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